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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1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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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 콩 전도사
재계 최고령 창업주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 백발의 노신사가 눈물을 글썽였다. 콩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그에게 ‘콩 박물관’ 건립은 평생의 숙원(宿願)이었다. 소아과 의사였던 그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죽어가는 신생아들을 살리기 위해 국내 최초로 두유를 개발했다. 그에게 콩은 ‘기적’이고 ‘생명’이었다. 콩에 대한 자료라면 무엇이든 구해 읽었고 누구를 만나도 콩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콩 전도사’인 그는 애초엔 콩에 대해 함께 연구했던 학계의 동지들과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경북 영주시가 콩의 역사와 쓰임새 등을 집대성해 소개하는 ‘콩 세계과학관’을 짓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부금을 쾌척했다. 그 박물관이 올해 4월 30일 문을 열었다. 이것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생존해 있는 한국 재계의 창업주 중 최고령이다. 우리 나이로 99세인 그는 올 1월 ‘백수연(白壽宴)’을 치렀다. 백수연을 한자로 쓸 때는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흰 백(白)자’를 쓴다. 100세보다 한 살이 적은 99세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다. 》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에게 한 세기에 가까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반세기 가까이를 콩 연구에 매달린 정 명예회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가족들은 노령의 정 명예회장이 개관식에 참석하는 것을 말렸다. 서울에서 영주까지 차량으로 꼬박 4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개관식에 나타났다. 거동이 편치 않아 휠체어에 탔지만 허리는 꼿꼿하게 편 채로. 올 들어 두 번째 외출이었다.

4월 30일의 인터뷰와 두 달에 걸친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에게 한 세기 동안 걸어온 길에 대해 들어봤다. 그래도 궁금한 사항은 손자인 정연호 씨에게 물었다. 의사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40대에 유학길에 올라 50대에 정식품을 창업한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내내 “뜻을 세웠으면 굽히지 말고 끝까지 해 봐라. 도전하지 않는 삶은 무력하다”고 강조했다.


○ 1937년 10월: 급사에서 의사로

소년은 급사(給仕)였다. 황해도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대중목욕탕 심부름꾼부터 모자가게 점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됐다.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용어가 어려워 옥편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거든요.”

주경야독으로 의사고시에 매달린 지 꼬박 2년. 그는 20세에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국내 최연소 의사라고 축하해줬다. 시험에 합격한 해인 1937년 서울 성모병원의 의사가 됐다. 병원 생활은 평탄했지만 수십 년 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사건이 생겼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갓난아기 환자가 병원에 온 것이었다.

“아이 엄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 걸려 왔다고 했어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요. 차트를 보니 병명이 ‘소화불량’이었는데,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떴습니다.”

어떤 의사도 아이를 살릴 수 없었다.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적지 않은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의사가 된 청년은 자책과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이 아이들을 언젠가는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 1960년 4월: 불혹 넘어 유학길

‘그래, 이제는 유학을 가보자.’ 당시 43세였던 그는 의사 초년병 시절에 접했던, 소화불량에 걸린 신생아들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의학 선진국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때가 가장 큰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주변에서는 반대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6남매가 있었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영국 런던대에 공부하러 갔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어요. 곧장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미국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지요.”

1964년, 그는 도서관에서 소아과 교재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lactose intolerance)’이 소개된 대목이었다. 20여 년간 지녀온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가진 신생하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우유 대용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줬던 콩국을 떠올렸고,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 개발에 매달렸다. 아내가 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을 만들면 그는 콩국의 영양이 충분한지 분석했다. 병원 지하에 실험용 흰 쥐를 잔뜩 갖다 놓고 콩국을 먹인 쥐에게 유당불내증이 나타나는지 등을 실험했다. 주변에선 “정소아과 원장이 미국에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고 수군댔다.

이렇게 3년 남짓 연구한 끝에 두유를 개발해냈고 이것을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줬다. 병상의 아이들은 눈을 뜨면서 기력을 차렸다. 콩에는 필수영양소(단백질 40%, 탄수화물 35%, 지방 20%)가 들어 있지만 유당은 들어 있지 않다.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이었다.

설사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서는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입소문이 났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아왔다.


○ 1973년 9월: 쉰 넘어 창업에 나서다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환자가 몰리자 두유 수요가 달렸다. 자연히 아픈 아이들에게 부족함 없이 두유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결국 정재원은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나섰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명을 합쳐 ‘베지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다시 한번 도전의 길에 접어들었다.

“개인 병원만 운영하다 기업을 이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지요. 하지만 신생아들을 살리려면 창업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가 사명감을 갖고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창업 후부터 올해(5월 말 기준)까지 만들어진 두유는 총 130억 개다. 이를 나란히 세우면 서울∼부산을 1630차례 오갈 수 있다. ‘인류 건강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저’를 정식품의 창업이념으로 정한 그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기업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진정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2015년 6월: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세상을 오래 산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호기심 천국’이다. 귀가 어두워 무선이어폰으로 TV뉴스를 보다가도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즉각 가족들에게 묻는다. 미국에 사는 손녀딸이 오면 굳이 영어로 안부를 묻는다. 시력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확대경으로 콩 관련 논문을 읽는다. 운동도 빠뜨리지 않는다. 3, 4년 전에는 집 근처 팔각정을 오갔지만, 거동이 편치 않게 된 후로는 정원을 여러 번 도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가족들은 “항상 무언가를 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신다”며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여기시는 게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요즘도 그는 매일 오전 6시 전후로 눈을 뜨자마자 EBS라디오의 영어 강의를 듣는다. 처음엔 더 많은 사람들과 콩의 이로움을 공유하고, 외국의 논문과 세미나 자료 등에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70대까지도 콩 관련 학회에 가서 영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 이후엔 잊지 않기 위해 계속 하다 보니 영어 공부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젊었을 때부터 노는 날과 일하는 날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스스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습관이 몸에 뱄어요. 배움을 통해 도전하는 느낌, 지식이 확장되는 느낌, 그래서 매일 매일 나아지는 느낌이 삶의 즐거움이자 삶의 원천이지요.”

그에게 인생은 여전히 배움의 연속이다. 그래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구를 좋아한다. 정 명예회장은 “앞으로도 콩의 영양학적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여전히 할 일이 많은데 기억력이 예전만 못해 독서량과 연구량이 줄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 턱시도 입고 아내 장례식… 로맨티시스트 정 ▼


아내이자 동료였던 故김금엽 여사… 관속엔 결혼 징표 면사포 넣어줘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아내인 고(故) 김금엽 여사와 사이가 각별했다.

그는 서울 성모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시절 아내를 만났다. 고아였던 아내는 수녀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 가톨릭 계열인 성모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중매가 여러 건 들어왔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박꽃처럼 예뻤던’ 아내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여성이 드물 때였지만, 그는 아내에게 유학을 권했다. 아내가 일본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해인 1942년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정 명예회장은 “선 봐서 결혼했더라면 처갓집 눈치가 보여 40대에 유학도, 50대에 창업도 선뜻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두유를 개발한 아내는 정식품의 ‘각자대표’(1973∼1987년)를 맡아 사업에서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줬다.

그런 아내는 2004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정 명예회장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그의 턱시도는 황해도 고향에서 올린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 부부는 반세기 넘게 ‘결혼의 징표’인 턱시도와 면사포를 간직했다. 턱시도를 입은 정 명예회장은 아내의 관(棺) 속에 흰색 면사포를 넣어줬다. 백발의 노신사는 아내에게 예(禮)를 다해 그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 정재원 명예회장은 ::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
―1937년: 의과고시 합격
―1937∼1942년: 성모병원 소아과 의사
―1946∼1948년: 서울대병원 소아과 의사
―1960∼1965년: 영국 런던대 소아과대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 유학
―1965∼1986년: 정소아과 원장, 혜춘병원 원장
―1973년: 정식품 설립, 대표이사 회장 취임
―1984년∼: 재단법인 혜춘장학회 설립, 이사장 취임
―2000년∼: 정식품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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