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주요 메뉴

정홍택의 사랑방 이야기
작성자 dk
작성일 2013-05-17 16:17
홈페이지 http://www.gtech.tv
ㆍ추천: 0  ㆍ조회: 5309      
아버지 (II) ---시려운 만남, 그리고 그 언덕을 넘어서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다.

철이 조금씩 들면서 나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고 머리만 쓰다듬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내 물음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 나는 그런 질문은 다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가슴 속에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아버지를 잊기도 하고 아버지 생각을 더 하기도 했다. 아버지 없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읽고 또 읽었다. 고구려 유리왕이나 플루타크 영웅전 속의 테세우스 황제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나의 단골 메뉴였다.

혹시 나의 아버지도 이런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혼자만의 꿈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가 내게 신표를 남겨 놓았다면 어떤 것을 어디에다 숨겨 놓았을까, 언제 엄마는 나를 따로 불러 근엄한 얼굴로 나에게 그 비밀을 가르쳐 줄까? 겁 없이 내게 대들기만 하는 저 동생 놈이 그 때는 꼼짝 못하겠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유리태자나 테세우스처럼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될 가까운 곳에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돈암동 나의 집에서 전차 한 번만 타면 되는 거리였다.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높은 분도 아니었다. 내게 신표를 남길만한 분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께 보내어 학비와 용돈을 타 쓰게 했다. 학기 초가 되면 어느 이른 새벽 어머니는 나를 깨운다. 새벽에 가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가는 길에 그 집에 들려 학비와 용돈 명세를 드려야 했다. 그 때 돈을 주면 좋고, 언제 다시 오라고 하면 다시 또 새벽에 가야 했다. 어느 때는 두 번, 세 번도.

일년 365일 중 나는 그 날이 제일 싫었다. 수학시험 날보다도 훨씬 더 싫었다. 나를 보내는 어머니의 표정이 유난히도 엄해서 감히 안 가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그렇게 좋던 엄마가 왜 이 날만은 그렇게 무섭고 단호한지 이해가 안 갔다.

나를 맞는 아버지는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성난 듯 딱딱하고 사무적이다. 인사 할 여유조차 얻지 못하고 학비와 용돈의 명세를 내미는 내 손은 금방 오그라들 듯 떨렸다. 대문 앞에서의 삭막한 대화가 끝나면 얼른 돌아섰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 집에 갈 날이 가까워지면 성난 어버지 꿈을 꾸기도 했다. ‘아버지’ 하면 ‘무섭고 싫은 사람’으로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아갔다. 아버지하고 같이 안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왜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감직도 하다. 나를 볼 때마다 잊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되어 그랬나 보다. 혼인의 서약을 저버린 자기 자신에게 회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사람 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수학 중 만났다. 풋풋한 사랑 속에 평생을 기약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생 끝에 아버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안되어 어머니를 배신했다. 병원의 한 간호사와 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천성이 조용하고 맑은 어머니는 사랑이 떠난 사람과의 아귀다툼 대신에 아들이 크면 학비를 대 주겠다는 약조만 받고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혼인 전 직업이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되돌아갔고 남은 생을 오로지 자식 둘을 키우며 사셨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불렀다. 또 아버지에게 가라신다. 이번 학기는 학비도 다 탔는데… 그런데 그 날은 친할아버지 제삿날이란다. 평소 돈 탈 때처럼 집 문 밖에서 그냥 돌아오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두루 어른들을 만나 뵙고 큰절을 하라는 명령을 빼놓지 않으셨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 가겠다고 버텼다. 어머니는 이 때 생전 처음으로 매를 들었다. 이를 악무신 어머니의 얼굴은 너무나 무서웠다. 고개를 숙이고 집을 나서는 나의 손에는 아버지의 신표 대신 왕복 전차표 두 장만이 달랑 쥐어져 있었다.

그 날 아버지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거기서 나는 두 이복동생들도 만났다. 아버지와는 달리 다른 어른들은 내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특히 작은아버지라는 분은 내게 각별했다. 그 분으로부터 나는 내 근본을 알기 시작했다. 학교 국어시간에 눈을 감고 외웠던 ‘사미인곡’의 작가 송강 정철이 내 13대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른들이 두툼한 족보를 꺼내 그 속의 수많은 한문 이름들과 그들의 관직을 설명해 주셨다. 그 족보의 맨 끝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나는 전율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 대문을 나서는 내 손에는 작은 직계 족보가 들려져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 반에서 내가 시를 제일 잘 낭송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리고 그토록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족보 속의 어느 할아버지는 한일합방 시 낙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 몸 속에 시인의 피와 애국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비록 유리왕이나 테세우스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갖지는 못했지만 이 아버지를 통해서 그 윗대의 선조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존해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친사촌들을 만났다. 그 후부터 제삿날 아버지 집에 가는 것만은 싫지 않았다.

만일 어머니가 나를 억지로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내 근본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몰랐을 것이다.

옛말에 어머니를 모르고 산 사람은 평생 슬프고 아버지를 모르고 산 사람은 평생 외롭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구멍을 메우지를 못하고 살았다. 그 분이 한번이라도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더라면,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었더라면 이렇게 허허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장성한 나는 취직해서 미국에 오게 되어 아버지를 찾아 갔다. 그 때 아버지는 작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아버지를 보고 나서도 나는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예의적인 대화를 나누고 인사하고 문을 나섰다. 끝내 마주 앉아서 허심탄회한 부자간의 대화를 가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저 싫은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국에 와서 나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진지한 신자가 되기까지 나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나를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바로 그 분이 ‘아버지’란다. 내가 경험한 아버지의 상(像) 때문에 이 두 번째 아버지에게 선뜻 다가설 수가 없었다. 아버지라는 단어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벽 속에 갇혀서 또 2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교회 부흥회에서 욥기 강해 설교를 듣다가 깨져 버리고 말았다. 탕자를 위해서는 아버지가 대문 밖에서 기다렸지만 나를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내 삶의 터널 속으로 손수 들어와서 내 손을 잡고 나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40년이라는 긴 아픔의 터널 문을 빠져 나올 때 캄캄한 마음의 깊은 속에서부터 오열이 북받쳐 올랐다. 댐 터진 물처럼 왜 그렇게 눈물과 울음이 나오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예배 중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엉엉 소리쳐 울었다. 눈이 붙도록 울었다. 한없이 울었다.

옛 아버지가 파 놓은 구멍은 이제 새 아버지가 넘치도록 채워 놓으셔서 아버지에 대한 선입관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옛 아버지의 웃음이 어떠셨을까 궁금해 하며 그럴 때마다 내 아이들을 돌아 보며 미소 짓는다.
 
이름아이콘 차문환
2013-09-05 16:46
그러셨군요... 마음 고생이 많으셨겟어요.
저는 8살때 돌아가셔서 아버지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제 블로그 에세이란에 아버지 가지 마세요 란 글이 있어요....
건강하시고요.....
   
 
작성일 본문내용 조회
2013-09-21 (시) 시월이 오면 우리 Cape May에 가요
    시월이 오면 우리 Cape May에 가요 ‘부-웅’ 뱃고동에 여름 작별하는 때 노랑 빨강 단풍 길, 바다 가는 길 손 잡고 달리며 내 할 말 있어요 May I love you forever?   시월이 오면 우리 Cape May에 가요 비인 모래밭 달리는 바람,  겨울의 전령 내 귀에 속삭이는 소라의 사연 속..
3914
2013-09-13 신부 아버지의 고백 (The Confession of a bride's father)
 딸을 데리고 혼인 예식장으로 들어갈 때 나는 정말로 울고 말았다.식장 문 앞, 눈부시게 흰 웨딩 드레스를 입은 그 애가 내 손위에 자기 손을 살짝 얹었다. 딸의 미세한 떨림이 내 손등을 통해 가슴에 와 닿는다. 문이 열리자 웨딩마치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다. 비디오 카메라 불빛이 우리 둘을 향해 비치고 양 쪽..
3941
2013-09-05 가을에 읽는 시 세 편
 아침 저녁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그리운 사람이 보고싶어 지는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어제 한국에 있는 친구가 이멜(e-mail)로 안부를 물으며 편지 말미에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달았습니다. 보통 남의 시(詩) 같은 것은 첨부 파일(Attachment File)로 보내는게 상례인데 이렇게 손수 한 자 한 자 쳐서 ..
3970
2013-08-30 산에 가서 "야호-"하지 마세요
 그 긴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는듯 합니다. 이제 입추가 지냈고 초록 잎들이 검푸른 색을 띠며 단풍을 준비합니다. 의사인 고등학교 동창생이 딸의 혼인식에 초대해 미네아폴리스에 며칠 다녀 왔습니다. 타 주에 사는 동창들도 초대받아 같이 행동하며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간듯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
1 4702
2013-08-22 새벽이슬 풀밭을 맨발로 걸어본 적이 있나요?
       새벽이슬 담뿍한 풀밭을 맨발로 걸어본 적이 있나요?  얼마 전 결심을 하고 아침 일곱 시 반에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 열흘을 계속하고 나니 제법 재미도 나더군요.그러던 어느날 특별한 경험을 했답니다.  공원의 풀밭 길에 들어서니 풀들이 밤새 이슬을 맞아 흠..
4030
2013-08-16 (어른을 위한 동화) 파치의 모험
    파치의 모험   I ‘파치’라는 별명을 가진 아기 파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조그만 파리가 옆에 오기만 하면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슬슬 피합니다.  골치가 아파진대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 이것 저것 눈에 띠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아무에게나 마구 물어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
4058
2013-08-09 시 갖고 장난하기
   며칠 전 짖궂은 제 친구 하나가 넉 줄짜리 시구(詩句)를 주며 이것으로 시(詩) 하나  지어보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음에 들면 점심 한 끼 잘 사겠다는 약속과 함께.   <개미는 구멍찾기 어렵고 새는 둥지찾기 쉽네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들은 싫어 않고 하나만 있어도 손님들은 싫어 하..
1 4134
2013-07-26 머스킷 스테이크 그리고 감자탕
 지난 주일 우리 부부는 커넥티컷주에 사는 큰 딸네 집엘 갔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미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두 손자가 새로운 게임을 배웠다고 우리 부부를 끌어 테이블에 앉히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도전을 합니다. 무슨 놀이인가 했더니 한국의 오목과 비슷한데 종이 위에 판 모양을 조금 바꾸어 그려놓고 &n..
1 4099
2013-07-15 어느 한국 여인의 특별한 인생
 조사 (Eulogy) - 박봉희 권사 Viewing시 여기 주 안에서 매우 크신 권사님이 누워 계십니다. 체구가 커서 크신 분이 아니고, 목소리가 커서 크신 분도 아닙니다. 생전에 자수성가하여 돈 많이 벌어 자선을 크게 한 적도 없으셨고,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지위라면, 젊었을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
3941
2013-07-06 경제환란의 주범 찾기 (<0>의 이야기)
    아마 요즘처럼 사람들이 만나면 돈 이야기를 많이 하던 때는 과거에 없었을 것이다. 서민들은 몇 십 쎈트를 아끼기위해 할인쿠폰을 가위로 잘라 지갑에 넣고 샤핑을 하는데 매스콤에서 흘러 나오는 월가의  뉴스는 그야말로 별세계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임원들의 년봉은 보통 “0(영零)”이 ..
3804
2013-07-05 바다 위의 뭉게 구름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닷가에 갔다가 바다는 보지 못하고 미술관에 가서 바다를 보았습니다. 여름에는 바다를 한번 보고 와야 제대로 지냈다는 느낌이 들고 해서 올 해도 딸네 식구들과 함께 바닷가엘 다녀 왔습니다. 바다를 보자마자 아이들은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뛰어듭니다. 그렇지만 난 애들과 함께 바..
3934
2013-06-11 자전거 인생
올해로 내 나이 예순이다. 소위 환갑나이다. 왠지‘환갑’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남의 옷 빌려 입은 것처럼 듣기가 거북하다. 나이를 한 해에 두 번 먹은 것도 아닌데 어찌해서 이리 빨리 왔는가. ‘환갑’이라는 인생의 정거장에 서 보니 11월 나목(裸木) 한 그루 외로이 서 있다. ‘퇴직’이라는 종착역이 손에 닿을 듯 ..
4489
2013-06-08 나는 왜 이 사진을 찍었는가
세상에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인생을 구수하게 기술한 명인은 그리 많지 않을듯 하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문은 아일랜드의 작가 버나드 쇼 묘비명이다. “우물쭈물하며 살더라니 내 이럴줄 알았지”. 전에도 이 촌철살인의 글을 만난 적이 없지 않았지만 나이 70 고개를 넘어 서니..
4912
2013-05-20 어느 봄 날의 마음산책
창을 여니 봄기운이 한창이다. 뉴스에서는 벗꽃이 만개했다고 보도하며 강변의 봄 축제를 보도한다. 외출을 하고 싶은데 딱히 갈 데가 없다.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해 어디든 같이 가서 봄나들이를 하자고 했더니 하나 같이 당장은 안된다고 딱지를 맞았다.이젠 모두 미국생활에 익숙해 져서 친구도 만나려면 미리 ..
5186
2013-05-17 아버지 (II) ---시려운 만남, 그리고 그 언덕을 넘어서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다. 철이 조금씩 들면서 나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고 머리만 쓰다듬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내 물음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 나는 그런 질문은 다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가슴 속에 ..
1 5309
2013-05-17 아버지는 멸종 중인가?
1999년 5월 22일자 타임지는 21세기 100년 동안에 일어날만한 변화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 중에는 ‘아버지가 공룡의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이 있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신생아가 태어나는데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 잡지는 <비젼 21 : 우리의 직업, 우리의 세계>라는 표..
4412
2013-05-17 (시) 왜 그랬지, 엄마?
왜 그랬지, 엄마? 세월이 바람이던가?내게 밀려 와서 날 밀치고는 도로 갑버리네.갑버리는 그 바람 타고돗단배 띄어 가면, 가면....울 엄마 계신 곳에갈 수 있을까?엄마랑 두 아들 정릉에 소풍 가서냇물가 바우 위에 보재기 풀어새 빨간 사과 셋돌돌돌 여울물에 씻어 먹었지. 하얀 달걀 입에 무니 노란 보름달 삼 색 ..
3809
123

Copyright © 2005 G Tech Inc. All rights reserved.
WE DELIVER DIGITAL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