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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데리고 혼인 예식장으로 들어갈 때 나는 정말로 울고 말았다. 식장 문 앞, 눈부시게 흰 웨딩 드레스를 입은 그 애가 내 손위에 자기 손을 살짝 얹었다. 딸의 미세한 떨림이 내 손등을 통해 가슴에 와 닿는다. 문이 열리자 웨딩마치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다. 비디오 카메라 불빛이 우리 둘을 향해 비치고 양 쪽에 갈라 앉아있던 하객들이 모두 일어섰다. 하얗게 펼쳐진 길로 첫 발을 내 디디는 순간, 딸과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며 아릿한 아픔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올랐다. 저 앞의 샹들리에가 눈물에 흐릿해지며 이리저리 흔들린다. 눈물탓이다. 엊저녁 리허설 때 그렇게 여러 번 연습했던 딸과의 발 맞추기도 다 잊어 버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겨우 하얀 길 끝에 도착했다. 거기 딱 버티고 서 있던 신랑 녀석이 꾸벅 절을 하더니 딸을 인계받아 단 위로 올라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내가 빨리 오라고 손짓 눈짓을 한다. ‘아, 내 자리는 바로 저기지.’ 정신을 수습하고 아내 쪽으로 허청허청 걸어가 앉았다. 자리에 앉고서도 내 눈은 단 위의 두 사람에 못 박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내 딸이 신랑감으로 정했을까? 키도 나보다 작은 편에 내가 아직도 안 쓰는 안경도 벌써 눈에 걸치고……. 어디 그뿐인가 술 담배까지 한다지……. 한 때는 나도 담배를 피웠었다. 그것을 딸 때문에 끊었다. 그 애가 여덟 살, 아마 초등학교 이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날도 나는 담배를 피우며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별안간 이 애가 나와 텔레비젼 사이에 딱 버티고 서는 것이 아닌가. 비키라고 손짓을 해도 막무가내 제 두 손을 허리에 딱 대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영락없이 남편 닦아세우는 억센 미국 부인의 전형적인 폼이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색하고 묻는다. “아빠, 아빤 우릴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아빤 담배가 나쁘다는 것 알아?” “그, 그래. 좋은 건 아니지.” “근데 왜 피워?”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냥 피우는거야.” “그럼, 우리 피워도 돼?” “그건 안되지. 이건 어른이나 피우는거야.” “우리가 어른이 되면 피워도 돼?” 우물쭈물 대답을 찾고있는 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아빠가 담배를 피우면 아빠만 죽는게 아니고 우리 식구 모두 폐암에 걸린대. 선생님이 그랬어.” 요 녀석이 학교 선생님의 사주를 받은 것이 틀림 없었다. 딸은 이제까지의 당당하던 자세를 무너뜨리며 내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빠, 사랑해. 아빠 일찍 죽는 거 싫어. 아빠, 담배 피우지 말어. 응?” 얼마 후 나는 금연을 단행했다. 금연 소식을 듣고 내 딸이 춤 출 듯 좋아하며 내 뺨에 수 없이 뽀뽀를 해 주었다. 나중에 커서 시집갈 때는 꼭 아빠 같은 남자하고 혼인을 하겠다고 식구들 앞에서 몇 번이고 맹세를 했다. 학년을 더하고 학교가 바뀌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던 내 딸이 언제 변심했을까? 식장에 앉은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대학 3학년까지도 딸아이는 심각하게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내보기에 훌륭한 청년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다가와도 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놓치기에 아까운 젊은이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되어, “얘, 그 학생 괜챦던데 한 번 교제해 보지 그러니?” 하면 딸은, “아직 아빠같은 사람 못 만났어요”. 더 말도 못 부치게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좋은 신랑감 후보들은 하나 둘 다 떠나가 버렸다. 나와 아내는 속이 탓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딸이 상기된 얼굴로 엄마 아빠에게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제가 천재를 만났어요. 얼마 전 학교 도서실에서 우연히 제 앞 자리에 앉았지 뭐얘요. 엄마 아빠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얘요. 이번 주일 교회에 와서 인사 드린다고 했어요.” 주일 날 그 천재를 만났다. 우리 부부는 첫 눈에 실망했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하며 양복 밑으로 받쳐입은 조끼…어느 것 하나 곱게 보이는 데가 없었다. 거기다가 담배 술까지 한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젊은이를 내 딸이 좋아한다고? 딸의 말대로 천재라면 필경 순진한 처녀를 홀리는 그런 바람둥이 천재일 것이다.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이 젊은이를 집으로 불러 두 사람을 앞에 앉히고 나는 인생과 결혼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경험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어느 면으로 보나 두 사람은 각자 서로에게 적합한 샹대가 될 수 없음을 누누히 설명했다.다시는 만나지 말 것을 강압적으로 명령하며 말을 맺었다. 딸은 묵묵히 자기 방으로, 천재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한 달 쯤 지났다. 딸이 밖에서 몰래 천재를 만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워낙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이인지라 우리 부부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딸이 변해갔다. 말 수가 눈에 띠게 적어졌는가 하면 날이 갈수록 얼굴은 창백해지고 몸은 수척해 갔다. 드디어 아내의 인내가 종점에 달했다. 결혼해서 잘 살고 못 사는 건 다 제 팔자가 아니겠냐는 아내의 설득에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천재는 다시 우리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는 180도로 변해 열과 성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었다. 천재도 천연스럽게 우리를 ‘아버님, 어머님’하고 부른다. ‘아니, 벌써부터 아버님이라고 해?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나는 몹시 못 마땅해 툴툴거렸지만 아내는 못 들은척 무시하고 제 할 일에만 열중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톨박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딸은 다시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재재대며 옛날로 돌아갔다. 딸의 변화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진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마침내 나도 백기를 들었고,모든 것을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가 부모가 만나고 혼인식 날짜가 정해졌다. 그 후로 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아내와 떠들며 이것 저것 웨딩가운을 입어보는 딸을 지켜보며 남 모르게 한숨을 쉬는 일 이외에는 …. 모녀는 희희낙락 혼수감 준비 쇼핑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가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을까? 하기야 첫 딸이니까. 결혼식장 앞 자리에 아내와 나란히 앉아 식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딸에 대한 배신감과 의문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물 좋고 학력 좋고 가문 좋은 그 많은 구애자들을 다 마다하고 왜 꼭 이 천재야야만 했을까? 담배 냄새가 싫지는 않을까? 결혼해서 남편이 술주정이라고 하면 얼마나 당황할까? 서울 중부 지방의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가 함경도 시가댁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할까? 수 많은 걱정거리들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식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 계속되는 주례사 속에 이 한 마디가 내 귀에 꽂혀 들어 와 나를 현실로 끌어 내렸다. ‘아, 그렇지, 사랑, 사랑, 그 사랑으로 이 아이들이 맺어 졌겠다. 그 사랑으로 우리의 숱한 구박을 참고 여기까지 왔겠지. 앞으로도 이런 사랑으로 어려움을 헤쳐 가리라. 그래, 술 담배 집안 문제는 너희들이 천천히 살아가면서 풀어 나가거라.’ 식의 마지막 순서, 신랑 신부가 청중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고만고만한 둘의 모습이 처음으로 제법 어울려 보였다. 내 마음이 열리나보다. 그러고 보니 안경 쓴 모습도 꽤 지성적이었다. 그 애들 뒤를 따라서 둘씩 짝지어 걸어 나갈 때 나는 내 팔을 낀 아내의 손을 내 몸 쪽으로 살며시 눌렀다. 아내가 나를 쳐다본다. 눈에 물끼가 어려있었다. 나는 아내를 보며 말없이 미소지었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