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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주일 예배시간에
자명종 시계 맞추는 일을 잊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일
아침에 아내는 성가대 연습을 하러 일찍 나갔고 나는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선잠에 눈 부비며 시계를 보니
“아차” 예배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와이샤쓰 넥타이 양복 양말을 허둥지둥 몸에 걸치고 교회로 달려갔다. 예배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온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예배실 문 앞에 당도하니 예배위원들이 죽
늘어 서서 순서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며 허리 깊이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마치 천국에서 천사들이 내려온 모습이다. 저 천사
비슷한 사람들에게 가서 이렇게 부탁해 보면 어떨까? ‘저, 혁대 좀 빌려주시겠어요? 예배 끝나고 나올 때 드릴께요.’ 이 부탁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예, 여기 있습니다.’하며 자기 혁대를 냉큼 뽑아줄 사람이 있을까? 그 반대로, ‘네? 그럼 전 어떠커구요?’하고 나온다면 부탁한 나나 부탁받은 그 사람이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둘이 같이 시험에 들 것이 뻔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고 또 남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지겠노라고 하셨는데 이런 일로 내가 혁대를 목에 걸고 물에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떡한다?” 제사장의 옷 짓는 법, 입는
법까지 세세히 지시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혁대 없이 예배보는 나를 보시면 눈살을 찌푸리실 것 같아 불안했다. 도무지
묘안이 떠 오르지 않는다. “그렇지. 어려운 일 당하면 기도하라고 했지”. 예배당에 들어 갔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 실에 내려오니 일은
더 어려워져 갔다. 배가 더 홀쭉해져서 바지가 사정없이
내려 온다. 심 호흡을 크게해서 복어배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간,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슬금슬금 배는 들어가고 바지는 내려온다.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 넣어 내려가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지만 신경은 계속 바지에 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 앞에 바지가 훌러덩 흘러내리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후유.
백과 사전을 뒤져도 인터넷 구글에 찾아 보아도 헛 수고였다.
다음 날 시내 도서관을 찾아갔다. 안내에 가서 어색한 얼굴로 양복을 열어 내 혁대를
보여주며 말했다. 보고 나서 저 쪽의 다른
사서에게 가서 쑥덕쑥덕 가끔 나를 가리키기도 하며 의논을 한다. 그리고는 나를 <패션 (Fashion)>에 관한 도서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혼자 이 책 저 책 훑어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넥타이, 구두, 모자, 목걸이, 부라쟈등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변화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그림으로 역사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는데 벨트(belt)에 대해서는 항목 조차
없었다. 아, 불쌍한 벨트여.
너는 사람 몸의 딱 중간에 수문장처럼 서서 배꼽을 보호하고 바지를
받쳐주어 남자의 심볼을 신비스럽게 감추어 주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너를 너무나 무시하고
있구나. 넥타이처럼 알록달록 팔랑팔랑 앞에 나서서 자기과시를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홀대를 할 수가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창세기 아담과
이브의 생각이 났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세기 3장 7절)
않을 수가 없었겠지. 그렇다면
혁대는 인류 최초 조상이 만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혁대가 바지를 붙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몸 중간에 골반뼈가 양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기 때문 이다. 하나님께서 골반뼈를 만드실 때 혁대를 받쳐 주는 일도 생각하셨 을까?
물론 생각하셨겠지. 웃음띤 얼굴로 골반뼈를 향하여 ‘바지를 잘 받쳐주거라’ 하셨겠지. 장식혁대를 만들어 붙여 패션(Fashon)의상의 역사를 개막한 이름없는 그 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