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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 구독을 끊었어요.” 며칠 전 아침식사를 하다가 아내가 한 말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매일 집으로 배달되는 일간신문을 끊자고 아내는 오래 전부터 이야기 해 왔기 때문이다. 은퇴 후, 우리는 살던 집을 팔아 지금 사는 이 콘도미니움으로 이사왔다. 새 삶의 터를 꾸미면서 아내는 고속 인터넷 을 설치하고는 큰 선심을 쓰는 양 내게 말 했다. “매달 인터넷 사용료를 100불 이상 지불하니까 이제부터는 문명의 이기와 더욱 친해 지세요.” 인터넷 속에 들어가면 모든 신문 잡지가 다 있으니 보고 싶은 기사들을 모니터에 떠 올려 읽으라는 것이다. 나중에 필요 자료는 컴퓨터에 저장해 두면 되니까 구태여 신문을 따로 구독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신문 하나 쯤은 꼭 보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우겨온 나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내의 주장이 하나도 그른 것이 없지만 나는 나 대로의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걸 어떡하랴. 첫사랑처럼 달콤한 인연을 나는 오래 전부터 종이 신문과 맺어왔다. 이것을 아직 아내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고백한다 해도, 한정된 수입 내에서 살아가려면 그 안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아내의 원칙에 내 청원은 한갓 철없는 애들의 투정같이 들릴 거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다. 1953년 9.28 수복 후, 나는 열 세살 까까머리 소년이었다. 서울 돈암동에 살던 나는 어느 날 오후 친구를 따라 시내의 어느 신문사 앞엘 갔었다.(미도파 백화점 뒤 경향신문사 였다는 것은 후에야 알았다.) 가 보니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 애들이 길 가득히 모여 무엇을 기다리는 듯 삼삼오오 서있었다. 얼마 후 검은 잠바를 입은 키가 큰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와서 각자에게서 돈을 걷어가지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 본 어른에게 가져 온 돈을 몽땅 주었는데 그 사람이 사라지자 마음이 몹시 불안해 졌다. 얼마를 기다렷을까, 그 사람이 가슴 가득히 신문을 가져 오더니 우리 각자에게 돈 낸 만큼 나누어 주었다. 내 품에 안긴 한 뭉치의 신문에서는 아직도 띠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풋풋한 인쇄 잉크 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받자마자 논에서 메뚜기 튀듯 우리는 제 각기 사방으로 흩어져 뛰기 시작했다. “경향 신문요. 경향 신문요.” 신문을 팔에 들고 크게 외치며 나는 돈암동을 향해 힘껒 달렸다. 을지로, 종로, 돈화문, 창경원 앞 거리를 뛰어가니, 사람들이 나를 불러 돈을 주고 신문을 산다. 팔 위의 신문은 점점 가벼워지고 주머니는 돈으로 불룩해지며 무게가 느껴 졌다. 신문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나를 쉬지 않고 뛰게하는 동력원이었다. 아, 그 때 만일 내가 신문 냄새에 반하지 않고 주머니 속의 돈 무게를 더 사랑했었 다면 아마 지금쯤 큰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하여간 난생 처음 내 힘 으로 돈을 번 것이 바로 이 신문 덕이었다. 그 후로 나의 신문사랑은 반세기를 넘어 변함없이 계속 되었다. 어린 나는 만화 <고바우>를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조금씩 들여다 보게 되었다. 또 만화 <왈순 아지매>를 보며 살벌한 세상을 유머적으로 해석해 웃으며 보는 방법도 해득했다. 언젠가는 서울신문 연재 소설에 김영주라는 화백이 삽화를 그렸는데 몇 줄 선(line) 만으로 그려진 젊은여자 주인공에게 홀딱 반한 적이 있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니라 삽화로 그려진 처녀의 얼굴에 말이다. 지금도 그 녀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 르니 아마도 내 이성에 대한 첫사랑은 이 신문 속 삽화가 아닐까 한다. 요즈음도 신문 읽기는 내 하루 시작의 통과례 이다. 매일 아침 식사 후 양지 바른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며 신문을 펴면 온 세상이 내 손 안에 들어온 듯 뿌듯해 진다. 신문 옆에는 언제나 12inch 플라스틱 자와 가위가 따라 다닌다. 흥미 기사, 만화, 사진… 등등 나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스크랲 감이다. 나는듯 마는듯한 인쇄잉크 냄새는 아직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안정시켜준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매일 가계부와 씨름하는 아내에게 나의 신문에 대한 고집을 계속하면 그것은 사치를 넘어 늙은이 망령으로 까지 보일 게 뻔하니까. 자, 마음을 정리하자. 그리고 잊어버리자. 손가락을 까맣게 물들이는 인쇄 기름과 잉크냄새, 좋은 기사 만날 때의 그 신선한 기쁨도, 그 기사를 오려낼 때 들리는 ‘사각사각사각’ 연한 가위질 소리도…… 이 모든 것이 세월이 가면 기억에서 지워질 수 있을까? 오래 전 직장 동료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거지신사>라는 조그만 조각품이 생각난다. 그 <거지 신사>는 공원 벤치에 폼잡고 앉아 신문을 펴 들고 있는데 바지는 헤져서 무르팍이 드러났고 머리 위 삐딱하게 걸친 낡은 중절모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다. 이에 상관않고 신문을 넓게 펼쳐들고 있는그 얼굴은 만족과 여유가 넘쳐 흐른다. 그 신문의 제호는 이름하여 <New York Times>.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을지언정 여유 있게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을 쫙 펴서 세상을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을 본다. 배달 신문과의 헤어짐을 -- 끝 -- |
운암
2015-05-1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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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읍니다. 그런데 나 역시 마음이 아프네요. 경제적인 계산으로는 지당하신 판단이나, 우리의 삶이 정신적인 양식이랄지 또는 낭만이라 할지? 우선 순위 결정이 부부 사이에서는 더욱 어려운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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