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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크리스마스도 예년처럼 그렇게 저렇게 보냈다. 지금은신년 2014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할 차례다. 더 이상 지금까지 살아 온 대로는 살지 말자 결심도 해 보지만 이것도 매년 똑 같은 년례 행사. 작년 이맘 때도 희망과 계흭을 꼭 차게 세웠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되었건만….. 마음 정리 겸 우선 일 년을 조망하는 시(詩)한 수 읽어보자. 일 월은 정말 춥고 적막해, 이월에 만물은 촉촉히 젖고, 삼 월에 봄바람이 살랑이며는 사 월에 세상은 옷 갈아 입네. 새들의 하늘 높은 노래소리에 오 월의 꽃들은 피어납니다. 햇볓이 쨍한 유 월은 한낮을 길게길게 늘려줍니다. 타는듯 뜨거운 칠 월의 변덕 태풍 구름 몰아오고 번개, 하늘을 갈라도 팔 월의 옥수수는 알이 여무네 짙은 색 과일 익는 구 월의 축복 선선한 바람부는 시 월이 와서 세상 만물 채색 옷 갈아 입을 때 하늘의 별들은 쏟아집니다. 으스스 파고드는 십 일월 한기(寒氣) 길어지는 밤의 길이, 깊어가는 나의 시름 정말 추운 겨울바람 살을에는 아, 십 이월. “ 일 년 열 두달”-- 크리스티나 로세티” 이 여류시인은 영국의 농촌에서 자란 듯하다. 고향의 일년을 그림그리 듯 묘사했다. 이렇듯 2014년 한 해도 빠르게 돌아갈텐데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나. 아래의 시인처럼 살아서야 내년 이맘 때 다시 한 숨 쉬며 후회하겠지?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또 밥 먹는다. “눈 오는 집의 하루” – 김용택 그래. 밥 먹고 소화시키고 화장실 가고, 또 밥 먹고 한 잠 자고 또 화장실 가고…. 그렇게 2013년 한 해가 지나갔구나. 아니 내 한 평생이 이렇게 지나갔는지도 모르쟎아. 아래의 시 처럼 쇠똥구리도 열심히 살며 보람을 쌓아가는데......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고 가다가 잠시 멈춘다. 지금 내가 거꾸로 서서 뒷발로 굴리고 가는 저것은 쇠똥이 아니고 풀밭이다. 이슬에 젖은 새벽 풀밭 위로 흐린 새 몇 마리 떠갔던가, 그 풀밭 지나 종일을 가면, 저물녘 노을에 물든 이포나루에 닿을까. 거기 묶인 배 풀어타고 밤새도록 흐르면 나 짐 벗은 채, 해 뜨는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쇠똥구리의 생각”-- 이건형 쇠똥을 굴리고 가는 쇠똥구리도 삶의 목표를 똑바로 세우고 열심히 밀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쇠똥구리의 동작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아주 큰 것을 발견했다. 쇠똥구리는 쇠똥을 굴려 풀밭을 지나가고 있는게 아니고 풀밭을 굴려 쇠똥을 풀밭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구나. 더 크게 보자. 그 풀밭은 지구의 한 자락이니 쇠똥구리는 차라리 지구를 굴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 이 작은 생물이 지구를 굴리겠다고? 쉬임없이 굴리고 굴려가면 어는 날인가 저물녘 노을에 물든 목적지(이포나루)에 닿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쇠똥구리. 목적지(해 뜨는 바다)에 도달하는 날, 그 고된 삶의 짐을 벗게 되겠지. 몹시 힘에 겨운 짐일께다. 어느덧 쇠똥구리는 시인 자신이 되어 버렸다. 나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게 남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몸짓이라 생각하고 실천해보자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이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맑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긍정적인 밥"--함민복 허허, 이 시를 몇 번이고 되 읽다보면 내 마음이 따뜻해 온다. 머리 속에선 고슬고슬 밥상에 올린 하얀 이팝이 그려지고 그 앞에 놓인 국밥에서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올라간다. 각박한 현실(각 진 됫박) 속에 감금되어 있던 맑은 소금이 (정신적으로나마) 현실을 박차고 나가니 푸른 바다가 한 없이 펼쳐져 있다. 이것이 우리 독자들에게 풍성한 바다를 보여주기 위한 시인의 소금같은 마음이 아닐런지. 그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이팝같은 풍성한 삶을 주고, 국밥처럼 따뜻이 덥혀주려고 결연히 가난한 인생, 시인의 길을 택한 거로구나. 내년에는 이런 시인들에게 국밥한 그릇 사 주는 심정으로 매 월 시집 한 권은 사 주리라 생각해 본다. 인생은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했겠지. 그래. 이기적으로 살아 온 내 삶을 되돌아보면 부끄러워 진다. 여기 다른 시인은 어머니의 무심한 말씀에서 깊은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프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전문— 어머니는 참 마음이 넓기도 하다. 어머니 눈에는 꽃도 열매도 장남인 시인도 참외 호박도 다 한 줄에 꾀인 내 식구들이다. 내가 아프니 앉을 의자가 필요하듯이 이 식구들도 다 무언가 의지할 의자를 필요로 한단다.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마저도 그 줄을 대이며 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이 어머니는 사는 게 별거냐고 하시며 인생이란 그저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이라고 한 마디 툭 던지신다. 이 말씀이 무하마드 알리의 일격보다 더 무서운 강 펀취가 되어 나를 때린다. 사는 건 결국 주위 사람들의 의자도 되어주고 지프라기와 똬리가 되어주는 거겠지. 나도 좋은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을 수 없이 해 왔건만 어디 세상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돌아가나. 오해도 생기고 예상 밖의 어려움도 겪게되어 내 속에서는 남 모르는 스트레스가 하나 둘 나중에는 하늘만큼 쌓여간다. 그러니 가끔가다 대포방귀 뀌듯이 마음껒 풀어보는 시간도 만들어 가며 살아가야겠다. 내 몸 안에서 하늘과 땅이 드디어 서로 통하는 소리 꽉 막힌 구멍이 시원하게 뚫리는 소리 생명의 폭죽이 터지는 소리, 소리 <방 귀> 전문 얼마나 크게 얼마나 시원하게 뀌었길래 마지막 행의 “폭죽 터지는 소리 소리> 해가며 끝을 맺었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귀를 한문자로 꽃다울 芳, 돌아 올 歸로 써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원하게 해 주는 고마운 방귀이니 잠간만 코를 막아주면 되쟎아. 그래, 나도 내년에는 스트레스 피해가며 좀 마음 편히 살아보자. 우선 오늘같이 음습하고 추운 날씨에는 점심으로 국수를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둥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국수”—이재무 갓 10대가 된 아들하고 겸상을 해서 뜨거운 국수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 모습이 정겹다. 하얗고 낭창낭창 길다란 국숫발과 까맣고 뻣뻣하고 짧은 아들의 코 밑 수염의 대비는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이다. 그 연한 국숫발을 먹으며 부인을 육감적으로 생각하니 여긴 결국 네 식구가 국수를 먹는 모습이다. 내게는. 그런데 다시 다시 읽어보면 어어, 이것도 그냥 국수먹는 시만은 아닌 것 같다. 국수 속에 인생이 녹아있네. 내 이야기를 좀 하자면 대학교를 졸업 후 나는 어떤 삶의원칙같을 것들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 원칙을 시에 대비해서 <일직선의 각진 표정>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펄펄 끓는 물 속에서>란 사회 속 직장 생활을 빗댄 말이고, 그 후의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란 세상과 타협하면서 변해버린 내 모습이리라. 그리고 나서 이 시인은 슬쩍 비꼬기도 한다.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내, 참, 허허. 이 시인은 <멸치>를 좋아한듯 한데 나는 <조개>를 좋아한다. 술안주로 먹으려고 사온 조개를 수돗물에 담그자 그것들 일제히 입을 다문다 몸 밖은 죽음 제 안의 어둠을 파먹으며 이승의 삶을 잠시 버티는, 그 불에 닿자 퍽 소리를 내며 다 놓아 버리는 온몸을 환히 열어 보이는 악착같이 잡고 있던 것이 生이라는 암흑이었구나 환한 죽음—이대흠 군침 도는 술안주 조개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이대흠이라는 시인. 조개가 죽지 않으려고 몸을 꽉 닫으니 그 속에는 캄캄한 암흑이었다가 생의 집착을 놓아버리니 환한 세상이 열린다는 시인의 희망도 알차다. 나도 내년에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살면 저런 환한 마음이 떠 오를까? 죽음도 무섭지 않을까? 자 자, 골치아픈 생각 좀 작작하고 침실에 가서 한 잠 자자. 척 들어누우니 생각나는 시가 하나 떠 오른다.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이 아니냐고 염려했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딍군다. “ 바닥론”--김나영 히히, 재밋다. 시 중간에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안에 평화가 오더라.> 뭐, 복잡하게 생각할게 없다. 평화란 내가 먼저 바닥에 짝 업드린 그 아량의 덕분이란다. 그런데 또 다른 시인은 밤에 잠을 자다가 감기에 걸렸단다. 나는 밤마다 침대 위에서 아내와 함께 이불을 덮고 잔다 나는 때때로 이불이 귀찮아서 걷어찰 때도 있지만 날씨가 추울 때 아내는 이불을 혼자 끌어다 덮는다 그럴 때 나는 허공을 휘첫다가 붙잡히는 것 아무거나 가령 노자의 도道와 같이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어떤 것을 대충 덮고 잔다 그리고 감기에 걸린다 이불 (二不)--박남희 이 시의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불’이라면 덮고 자는 ‘이불’일 것이지, 궂이 ‘二不’이라고 토를 단 데는 필시 무슨 하고픈 말이 있으렸다. ‘二不’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으로 이불 속에서 하나 (나) 그리고 또 하나(아내)가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날 셋(자녀), 넷도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둘이 하나가 되는 이불 속에서 나는 가끔 걷어 차기도 하고 (그래서 아내가 추웠겠지), 아내는 추우면 이불을 혼자 끌어다 덮는 바람에 남편은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때는 둘이 합한 하나가 아니고 서로 싸우는 둘이라는 얘기렸다. 그럴 땐 허공을 휘젓다가 대충 잔다고 한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 버렸다. 둘이 하나가 되는데 실패한 대가(代價)가 혼자 살면서 자기 이불 덮고 자는 것만도 못하다는 그런 말 아닐까? 여기에 노자의 도가 왜 나오나?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만물의 근원은 부부관계에서 나오고 그 결과 아이가 나오면 그래도 하나가 되어야지 이게 깨지면 우주의 법칙도 깨진다는 얘긴가 보다. 부부가 사랑할 때와 그 사랑이 식어질 때를 아래의 시인은 밥알을 보면서 그려 내기도 했다.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밥 알” --이재무 이 시에서 <찬밥>이 되어 <물에 말리니>라는 다섯 째 행(行)이 부부지간의 DMZ가 되는 분계선이다. 그 위와 그 밑이 처참하도록 달라진다. 여기서 나는 한용운 선사의 글을 인용하며 사랑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의 묶여서 고통을 받지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더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 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어느 선사의 설법’—한용운 불교에서의 <대해탈>은 사랑의 속박에서 얻은 것이라는 삶의 역설적이면서도 초월적 진리. 그것은 어쩌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글을 너무 많이 썻나보다.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이 글 초두에 나는 이렇게 썻다. <이제는 더 이상 여태껒 살아 온 식으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 김기림이란 시인은 이런 결심의 나를 비웃는 시를 오래 전에 썻다.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가는 “엇둘, 소리…….” 자연의 학대에서 너를 놓아라 영사의 여백 영혼의 위생(위생)데이 일요일의 들로 바다로……… 첫 연에서 “월, 화, 수, 목, 금, 토”의 각 요일이 한 자씩 한 행을 이루면서 경사지게 배치되었다. 또 둘째 연에서도 “하낫 둘”이 한 칸씩 쳐져서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이 시인은 삐딱하게 우리의 결심을 비웃고 있다. 월요일에서 시작되는 한 주일의 결심이 토요일까지 이르는 동안 차츰 힘이 빠지는 과정을 그림을 그리듯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또 두 번째“하낫 둘”의 구령이 한 칸 쳐져서 배치된은 두번 째 구령의 소리가 첫 번의 큰 소리에 비해 점점 자신 없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 지금 내가 내년에는 무엇을 하겠다고 아무리 굳게 맹서를 하더래도 작심삼일(作心三日) 내 년 이맘 때에 가서는 또 다시 이런 참담한 심정이 될 것이 뻔하다고 이 시인은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첫 째로 내가 할 일은 “너를 놓아라”하듯이 나를 자유롭게 방목하는 일이 아닐까. 자연을 좀 더 가까이 하는 것은 내 生의 여백이 되겠지. 천국가는 것만을 목표로 내닫던 내 영혼도 잠간잠간 쉬며 소독도 되어서세상 사람들을 좀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나를 정죄하고 옥죄게 하는 속박에서 나를 해방하는 내년이 되기를 먼저 기원해야지. 나는 지금 나의 봄을 꿈꾸며 2014년을 내다본다. 일 년내내 피는 나만의 봄을 그려보련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봄”에서—윤동주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도 새 봄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Happy New Y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