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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9일은 한글이 제정된지 567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올해 다시 법정 공휴일로 재 지정되었다. 23년 만의 희소식이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문화재의 첫째가 한글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이 한글에 대해서는 수많은 글들이 발표되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아야 할 것이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한글 창제 당시의 한글과 엄청나게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훈민정음이 세상에 공표된 생일이 있듯이 이 변화도 하루 아침에 일어났기 때문에 생일이 있다는 것이다. 1446년 10월 9일 훈민정음이 세상에 공표되었듯이, 1896년 4월 7일 한글판 <독립신문> 제 1호가 발간되어 세상에 선을 뵈었다. 이 독립신문을 통해서 한글은 더 이상 천덕구러기 서민의 글이 아니라 한 나라의 글로써, 나라와 함께 세계를 향해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언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공부한 서재필 선생이 한국에 돌아 와 처음으로 순전히 한글만 사용하여 찍은 최초의 신문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의 주도로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다. 그 창제동기를 "우리 말이 중국과 달라 서 국민들이 서로 의사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이를 불쌍히 여겨 우리 말에 맞는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이 ‘훈민정음’ 이다. 그러나 중화사상이 뼛속까지 물든 당시의 양반들은 이 좋은 이름을 버리고 ‘언문’이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쓰는 글 ‘아햇글’, 혹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해서 ‘암클’이라고 까지 비하하며 자기들은 배우기 조차 꺼려했다. 이렇듯 한글은 원래 나랏글,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서자 대우 받으며 조선조 450년을 지내야했다. 그런 중에서도 다행한 것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등 서민들을 사랑하는 선비들이 백성을 선도하는 글을 한글로 짓기도 했고, 황진이 같은 여인, 기녀들이 아름다운 시조를 읊어서 한글은 문학적으로도 손색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오면서 한글이 외국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아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한글로 각각의 복음서를 작게 인쇄해 국내에 반입하여 민간에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서민 전도의 목적이었으므로 여전히 중, 하류층의 글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재필선생이 미국에서 귀국하여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글자를 한글만을 사용하였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계층이었던 신흥 상인들을 설득하여 신문 하면에 상품광고도 실어 신문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다. 이 신문이 서울에서 발간되어 판매되자 한국사회는 거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신문이 인기가 있어 얼마 안 있어 전국 주요 도시에 지사가 속속 설립되었다. 무식한 상놈들이라고 업신여겼던 서민들이 이 신문을 읽고 유식해 지기 시작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바깥 세상 즉 외국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중국을 통해서만 외국의 소식을 듣던 양반들은 상놈들의 유식한 말에 깜짝 놀랐다. 저들도 독립신문을 사서 읽어 보려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많은 양반들이 소위 언문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것들은 독립신문을 읽어 유식해 지고 양반들은 까막눈이 되어버려 어쩌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유식자와 무식자가 뒤 바뀐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한문만이 진정한 글자요 모든 공용 문서는 한문으로 써야 한다는 종래의 통념이 뿌리채 뽑하는 혁명의 대 변화가 온 것이다. 독립신문으로서 한글을 국가 공문서로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사백여년 동안 수모를 겪어 온 한글이 거듭 태어나는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정부는 <독립신문 제 1호>가 발간된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선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날은 그야말로 <한글의 광복절>이다. 서재필선생의 ‘한글 살리기’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어가 띄어 쓰기에 의해 글의 의미가 뚜렷해지는 점을 깨닫고, 최초로 ‘한글 띄어 쓰기’를 실행했다. 다시 말해 각각의 단어에 독립성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한글은 종서의 형식으로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한 칸의 여백도 없이 연이어서 쓰여 왔다. 그 기나긴 세월을 이 형식 속에 갖혀서 전혀 언어의 발전을 못하고 지내온 것이다. 예를 들면, 송강 정철의 시조도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여기서는 횡서로 쓴다. 오른 편으로 부터 읽는다.) 면시니아곳분두니시라기날님마어고시흐나날님바아 <-- 리오사갑혀다대어을덕은슨업가탄가날하가실라사이몸이 이것을 현대말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가 없는 은덕을 어디에다 갚으리 위의 두 문장을 비교하여 보면 띄어 쓰기의 장점이 확연히 돋보인다. 독립신문이 발행된 다음 해 서재필선생은 주시경선생을 한글 담당 직원으로 채용하여 계속 한글을 개량하도록 독려했다. 이 덕분에 <한글문법>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새로운 문체의 한국 문학이 태동하였다 (주시경선생이 최초의 한글 문법책을 저술함). 이후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를 시작으로 윤동주의 ‘서시’,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글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감히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나으신 분이고, 서재필선생은 한글을 길러 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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