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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까마귀 두 마리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 까마귀를 구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가을 어느 주말 오후였습니다. 나는 집사람과 함께 필라델피아 교외 나버스 타운(Narberth
Town)을 드라이브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라 빌딩은 높지
않았고 가을을 흠뻑 먹은 가로수는 이삼 층짜리 상점들의 쇼 윈도에 비추어져 화장대 앞에 앉은 젊은 여인처럼 예뻤습니다. 차도 많지 않아 집사람에게 운전을 부탁하고 나는 옆 좌석에 앉아 창 가를 스치는 만추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저 앞에 이상하게 새까만 물건이 길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가만히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길 가장자리 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어, 저게 뭐지?” 나는 잘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차는 계속 다가가고 우리 차와 그 까만 물체와의 거리도 금방 가까와져
갑니다. 자세히 보니 그 움직이는 물건은 까마귀였습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가 한데 엉켜 붙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부상을 당한 듯 했고 성한 두 마리가 다친
놈을 길가 쪽으로 밀어내는 중이었죠. 까만 날개를 펄떡거려 땅에 먼지를 내며 필사적으로 그 동료를 밀고나갑니다.
“어, 어, 스톱. 스톱!” 나는 급히 외쳤습니다. 집 사람은 핸들을 돌려 간신히 그들을 피했습니다. “후유” 안도의 한 숨이 나오더군요. 이제 내 차는 그 까마귀들을 뒤로하고 점점 멀어져 갑니다.
나는 몸을 비꼬아 뒷창으로 내다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데 어우러진 세 까마귀가 간신히
길 가 쪽 안전한 곳에 도착한 데 까지는 보았습니다. 더 이상은 뒷차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고가 났을까? 짐작컨대 길 가운데 있는 다람쥐 같은 동물의 시체가 있어 세 친구가 같이 정신
없이 뜯어 먹고 있는 중, 빠르게 달려 오는 차에 한 놈이 미쳐 피하지 못하고 차체에 날개를 부딪혀 상한
게 아닌가 추리해 보았습니다. 길 가운데로 뚝 떨어져 허우적거리니 나머지 두 마리가 달려들어 길 가 쪽으로
밀고 끌고 하는 순간에, 아마도 우리 차가 그 현장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우리 차가 가까이 왔는데도 그 세 놈 중
어느 한 놈도 날아 도망가지를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등산하면서 새끼 새가 땅에 떨어져
있으면 그 부모되는 새들이 주위를 빙빙 돌며 안타까워 하는 장면은 몇 번 보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광경은 처음 보았습니다. ‘다행히 셋이
떼죽음은 면했지만 그 부상병을 나무 위까지 어떻게 올려다 놓지?….’ 사실 나는 평소에 까마귀를 좋아하지 안았습니다. 그 먹물같은 새까만 몸이며 못생긴 부리, ‘꺼억 꺼억’ 불길한 울음 소리, 쓰레기 차가 오는 날 내놓은 쓰레기 백을 마구 찢어내 다 헤쳐놓는 훼방꾼… 미워해야 할 이유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본 까마귀는 우정과 희생의
경이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까마귀에 대해 조사 해 보았죠. 한국에서도 이제는 까마귀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을씨년스런 겨울 아침, 고목 가지 위에 앉아 서리 내린 마을 들판을 굽어보던 그 까마귀들. 한국 사람들은 그 색깔과
울음 소리와 썩은 고기를 먹는 식성을 미워해서 보이는 대로 마구 죽였답니다. 그 까마귀들이야말로 몇 천 년을 우리
민족과 고락을 같이해온 친구였는데 말이죠. 미국에서도 그랬답니다. 농부들은 까마귀가 곡식을 쪼아 먹는다고 짐작하고 총부리를 겨누었답니다. 1940년 일리노이주의 환경 보호국은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키면서까지 해서 32만 8천 마리의 까마귀를 죽였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후회했습니다. 그 해부터 각종 해충이 들끓기 시작한거죠. 학자들을 불러 연구를 시켰답니다. 옥수수를 쫗아먹는 줄 알았던 까마귀가 실은 옥수수에 붙은
해충을 더 많이 잡아 먹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 후였지요. 까마귀에 대해 연구를 할수록 더욱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새들 보다 가족적이고
정과 의리가 두텁다는 군요. 어미 새가 늙어 날지 못하면
자식 새들이 먹이를 물어다 봉양을 한답니다. 그것도 삼 년 내지 사 년까지도 말이죠. 우리 나라에도 옛말에 ‘반포지효(反哺之孝)’’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것과 같은 효도’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이제 나는 내 경험으로 “까마귀는 효성 뿐만 아니라 우정에 있어서도 으뜸가는
짐승이다”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던 내가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고전을 찾아보니 우리 조상 연암 박지원
선생은 그 모습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여 아주 큰 발견을 하셨더라구요. <본 것이 적은 자는 백로를
내세워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내세워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 아! 저 까마귀를 보라. 날개가 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긴 하지만, 문득 자세히 보면 부유스럼한 금빛이다가 다시 초록색으로 반짝이기도 하고 햇빛에 비치면 붉은 색으로 날아오르며 눈이 아물거리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좋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저것은 꼭이 정한 색깔이 없는데 내가 먼저 눈으로 어느 한 색깔로 규정해 버렸구나.> 까마귀가 검은 것은 사실이지만 광선 상태에
따라, 움직임에 따라 색갈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연암선생은 사물의 본질을 꾀뚤어 보신 분이시었습니다. 우리 전래 동화 견우직녀 이야기에도 까마귀는
자기 희생을 하며 좋은 일을 합니다. 7월
7석(음력)이 되면 이 두 사람을 만나게해
주기 위해 까마귀들이 모여 자기들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죠. 그래서 이 명절이 지나면 까마귀 머리에는
털이 다 빠져 대머리 까마귀가 된다고 합니다. 견우직녀가 그 머리를 밟고 지나갔기 때문이랍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경솔하게첫
인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며 살았나 부끄러워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수록 그날 저녁 그 까마귀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집니다. 그
때 내가 차를 세우게 하고 다가가 그 까마귀 날개를 고쳐주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까마귀와 내가 서로 대화를
할 수 없으니 내가 선한 뜻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리지? 그러다가 문득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까마귀도 사랑하시는
분임을 굳게 믿고 더 이상 생각을 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까마귀 만세. |
차문환
2013-10-2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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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만세..... 까치보다 낫다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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